작별인사

1.
2009년 2월 16일, 나는 진주에 있는 공군 훈련단에 입소할 것이다. 

2.
2008년 6월의 어느날부터 2009년 2월 사이에 나는 시한부였다. 시한부라는 말은 끝이 정해졌다는 것. 미래도 과거라는 말이다. 끝이라고 정해진 어떤 시점까지의 날들도 결정되어 버린다. 미래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다가왔고, 지나간 과거는 빠르게 나에게 멀어져갔다. 나는 그 시간의 기억들을 잡아 두려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본 영화의 목록을 작성했다. 결정된 미래가 과거로 바뀌는 순간마다 나는 결정된 미래를 내 목록에 옮겨 담았다.

3.
몇 년 동안 안정되었던 나의 세계는 다시 흔들렸다. 처음에는 내가 흔들리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 흔들림의 절정에 서 있다. 나는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기대와 실망이 왜 같이 느껴지는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

4.
지난 주말 두 명의 지인과 가진 술자리에서 나는 그 질문을 또 들었다. 너는 왜 병역거부 계획을 포기했는가? 나는 대답했다. 무서워서요. 

5.
2008년 10월 20일, 나는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했다. 입소대대에서 나는 나의 인격이 붕괴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전에 내가 알던 사람들과 나의 관계가 변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아팠다. 그리고 2008년 10월 마지막 금요일, 나는 논산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6.
나의 시한부는 연장되었다. 

7.
시한부의 나는 사랑을 했다. 나는 직업이 없었다. 나는 블로그에 글을 썼다. 나는 모든 정치와 경제 뉴스를 꼼꼼히 챙겨 읽었다. 나는 개봉하는 거의 모든 영화를 봤다. 나는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보았다. 나는 소설을 읽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나는 변했다. 나는 신념의 인간이 아니라, 회의의 인간이 되었다.

8.
돌아와서 나는 다시는 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군을 면제받을만큼 아프지 않았다. 나는 내 인격이 붕괴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병역거부를 생각했다. 

9.
그러나 나는 감옥도 무서웠다. 세계와 격리되는 것, 나의 관계들이 단절되는 것, 지금의 내가 나 아닌 어떤 것으로 바뀌는 것이 무서웠다. 

10.
내가 무서웠던 직접적인 원인은 군입대라는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본질은 시간이 간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의 이름을 '운명'이라고 부르자.

11.
2009년 1월 나는 김훈을 읽었다. 

12.
2009년 2월 나는 김연수를 읽었다.

13.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그들의 말은, <어린왕자>에 나오는 덧없음의 우화를 떠올리게 했다. 어느 날 나는 그 이야기를 내 친구에게 해준 적이 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박물학자는 덧없는 장미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덧없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소중한 것은 덧없는 것들이다.

14.
나는 내 사랑의 덧없음을 언젠가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5.
나는 지난 몇 달간 꿈을 자주 꿨다.

16.
죽음은 내 주위에서 어슬렁거렸다.

17.
첫 연애가 끝났을 때가 생각난다. 그 때 나는 추위에 시달렸다. 그러나 귀는 밝아졌다. 나는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는 물론, 새벽이 시작되는 소리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18.
그리고 2008년 10월에 논산에서 내가 만난 것도 '운명'의 한 자락이었다. 그것은 정치와 제도라는 탈을 쓰고 있었고, 너무나 두려워서 난 그 탈 뒤에 있는 검은 것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는 운명의 하위 범주이다. 정치의 권위는 운명에서 온다.

19.
나는 더 이상 병역을 거부할 수 없다.

20.
나는 여전히 당신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된다. 지금의 나의 인격은 붕괴할 것이다. 이것은 운명이다. 입대하지 않아도 언젠가 우리가 맞이했을 운명. 그러니 오늘의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남긴다. 

21. 
안녕.

2009/02/12 14:40 2009/02/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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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름다운 입대

    Tracked from "꽃은 경계에서 핀다." 2009/02/13 23:40 Delete

    1. "이제 병역거부에 대해서 말하지 마요." 작년 말,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내게 던진 말이다. 한동안 내게 군대는 어떻게 할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병역거부 고민 중이에요."라고 답해왔다. 병역거부를 고민 중. 병역을 거부하겠다는 말도 아니고, 고민 중이라니. 약간의 신념과 미안함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신념이라고 한다면 집총거부는 아니었고, 국가가 시민들에게 애국심 따위의 책임을 동원하면서도 정작 시민의 권리에 대해서는 여러..

  2. 안녕

    Tracked from SAVE A TREE 2009/02/15 10:08 Delete

    그의 안녕을, 내 온힘을 다 해 빈다. 세상 만물을 향해서. 1. 애써 자려고 노력해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마신 술 때문만은 아니다. 2. 2008년 6월 어느날, 거대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한켠에서 그를 만났다. 식상의 극단을 맛본후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주변이었던 나에게, 그는 여타의 사람들과는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놀라웠다. 내가 다시한번 사람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나를 다시 봤고, 나에게 그런 느낌을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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